1. 브랜드, 모델명
랑에 삭소니아 씬 핑크골드(A Lange & Sonne Saxonia Thin Pink Gold)
Ref. 201.033
2. 시계 사양
무브먼트 : L093.1
- 파워리저브 72hr
- 수동 무브먼트, 3.0Hz
- 랑에 인하우스
케이스 크기 : 37mm / 두께 5.9mm
러그 사이즈 : 20mm
러그 투 러그 : 43.4mm
방수 : 3 bar
소재 : 18k 핑크골드
3. 들이게 된 계기와 경험담
이전 브레게 클래식 5907 게시글에서도 언급하였듯, 좋은 심플 수동 드레스 워치에 대한 열정은 언제나 있어왔다.
브레게 클래식 5907을 사이즈와 고유의 개성이 없다는 이유로 방출을 결정하긴 했지만, 해당 시계의 완성도가 워낙 높았던 지라 나의 기준도 덩달아 높아져 다른 웬만한 브랜드들의 드레스 워치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오메가, IWC, 까르띠에, 그랜드세이코 등 다양한 브랜드의 드레스시계들을 손목위에 올려보았지만, 그 어느것도 브레게 클래식 5907이 가지던 디테일과 마감을 따라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손목위에 지인의 랑에 1815를 올려볼 기회가 생겼고, 나는 그 순간 왜 다들 랑에에 그렇게 열광하고 환호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삭소니아 씬을 손목위에 올리기까지의 시간도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던 것도 자연스러운 흐름.
첫 인상은 '단아하고 단정하며 기품있다' 였다.
실버버 다이얼에 바인덱스 + 날짜창은 물론이고 초침마저 없는 투핸즈 + 브랜드 로고로만 구성된, 말 그대로 미니멀한 모습이었지만 전혀 비어보이지 않고 오히려 꽉 찬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은으로 구성된 실버 다이얼(랑에에서는 Argente라는 용어를 쓴다)은 광원에 따라 순백색에서 크림색을 오가며 묘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고, 뛰어난 마감을 보여주는 칼침 핸즈는 보는 이를 즐겁게 해주었다. 'Simple is Best, Less is More' 이란 말을 이해할 수 있던 시간.
단정했던 앞면과 다르게, 뒷면은 독일식 시계의 화려한 마감을 보여주었다.
독일의 전통적인 3/4 플레이트를 맞췄기에 밸런스휠 외에는 보이는 부분이 사실상 거의 없긴 하지만, 보여지는 부분들은 무엇하나 부족함도, 군더더기도 없는 깔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더불어 37mm의 사이즈 + 5.9mm의 두께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드레스워치의 기준에 부합했다. 평상복뿐만 아니라 풀정장을 입으도 셔츠 손목 안에 쏙 들어가는 그 느낌은 경험해본 자만이 알 것이다. 그러면서도 18k 핑크골드의 시계답게 적절한 무게감이 잡혀 있어서 가볍지만 분명한 존재감을 손목위에서 보여주는 것도 특징이었다. 여기에 72시간이라는, 실생활에서는 충분하고도 남는 파워리저브는 착용자에게 있어서 무엇하나 불편감을 주지 않던 시계였다.
4. 방출한 이유
이렇게나 만족했던 시계지만 내가 방출한 이유는...
사실 없다.
당시에는 37mm의 사이즈가 조금 작게 느껴진다, 와인딩감이 별로다, 초침 없는 것이 너무 심심했다, 드레스워치를 생각보다 찰 일이 별로없었다 등등의 이유가 여럿 있었지만, 종합해보면 이유는 단 하나로 정리 가능했다.
1) 내가 이 시계를 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단순한 가격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시에도 이미 이 시계보다 비싼 시계들을 여럿 경험해봤었기에 (당장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시계인 구그린섭만 해도 중고시장가격은 더 높았으니) 금전적인 문제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이 시계를 차고 있으면 '내가 시계에게 압도당하는 기분'이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너무나도 높은 완성도를 가진 미니멀리즘 시계였던 삭소니아 씬은 내게 단순 시계가 아닌 예술작품처럼 느껴졌고 내가 무엇하나 건드리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기스하나 내기 싫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계에 필름작업을 했던 것도 이때.
그러다보니 결혼식이나 풀 정장을 입어야 할 때를 제외하면 실제로 손목에 올리는 날이 거의 없어졌고, 가끔 보관함에서 꺼내서 와인딩하고 뒷백을 구경하다가 다시 보관함에 넣는 날들만 반복될 뿐이었다. 가끔씩 차는 날마저도 굉장히 조심스레 신경쓰며 '시간이 아닌 시계를 보기 위해' 손목을 보는 일이 잦았다. 이는 '사람은 시계를 차야하지, 모시고 있으면 안된다' 라는 나의 철학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고,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아직 이 시계를 찰 준비가 되지 않았다.' 라는 결론을 내고 방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엄청 후회를 했고,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이다)
5. 교훈
다른 방출했던 시계들과 다르게, 시계의 부족함이 아닌 나의 부족함 때문에 방출했던 시계.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냥 방출하지 않고 보관함에서 잠재우다가 나중에 차면 되던 일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지만, 막상 되돌아가면 동일한 생각의 과정을 거쳐 결국 언젠가는 방출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랑에라는 브랜드를 처음 접하게 해주었고, 아주 큰 만족감을 주었으며, 언젠가 다시 랑에 1을 꼭 들이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 시계. 그리고 그 날이 왔을 때 다시 나의 모자람으로 방출하지 않기 위해 내가 더 멋진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해준 시계. 다른 모든 것처럼, 시계에도 적절한 타이밍과 인연이 필요하단 것을 알게 해준 시계.
교훈
시계에도 적절한 타이밍과 인연이 필요하다
더 멋진 시계를 찰 수 있는 멋진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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