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1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관람한 '추락의 해부' 리뷰이다.
새해도 밝았고 설연휴겠다 해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싶어진 하루라 급하게 무엇을 볼지 고민하던 중,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라는 문구에 끌려서 보게 되었다. 막상 예매까지 하고선 보니 이전에 인상깊게 보았던(결코 재밌게 보진 않았다) 영화인 '시빌'의 감독인 '쥐스틴 트리에'의 작품인 것을 보고 기대 반, 걱정 반의 상태에서 보게 되었다.
오늘도 관람은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봤다. 연휴임에도 자리는 꽤나 널널해서 좋았고, 무엇보다 영화표값도 싼 편이라 매번 만족하는 영화관이다. 집에서 거리도 적절하고, 영화보고 청계광장 산책하기도 좋은 것도 깨알 장점
시놉시스
유명작가인 주인공 산드라는 예술가인 남편 사뮈엘과 시각장애가 있는 아들 다니엘, 그리고 안내견 스눕과 함께 살고 있다. 어느날 발생한 사뮈엘의 추락사로 인해 산드라는 용의자로 지목받게 되고,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게 된다
감상
우선 영화 시놉시스만 보고선 수사물, 혹은 범죄 스릴러라 생각했던 나를 반성했다.
전형적인 '프랑스식 법정 드라마'의 영화로, 사뮈엘의 추락사에 대해 조금씩 파헤치며 법정 공방을 다루는 것이 주 내용이다. 엄청난 과학수사나 추리가 등장하지도 않으며, 큰 반전이나 서스펜스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저 툭툭 중간중간 등장하는 '산드라'의 과거 이력과 전형적인 '프랑스식 가족사', 그리고 해체된 현대의 가족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을 뿐이다.
분명 법정 다툼중인데도 이상하게 웃거나 개인 변호사인 '뱅상'과 너무나도 친근하게 행동하는 '산드라'의 모습, 분명 4살 때 시각을 거의 잃었다고 했음에도 가끔씩 무섭게 동공이 정확하게 카메라를 항햐는 '다니엘'의 얼굴, 묘하게 자주 카메라에 포커스되는 '스눕'의 모습은 영화 내 등장하는 묘한 음악과 더불어 계속해서 반전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마치 '저거 진짜 산드라가 범인 아니야?', '다니엘 사실 앞을 볼수 있나?', '안내견 스눕이 사실 떨어트린건가?'와 같은 의문을 계속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결국 '사뮈엘'의 자살로 결론이 난다. 여러 정황적 증거와 더불어 아들인 다니엘의 증언까지 모든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내내 이러한 의문이 들게하고, 법정다툼이 끝난 후 영화가 마무리되기까지의 마무리 10분간의 영화 시퀀스를 보면 끝까지 묘한 씁쓸한 뒷맛이 들게 하는 것은 분명 감독의 의도라 생각한다.
종합하면, 난 참 실망이었던 영화였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들도 좋고, 영상미나 몰입감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과연 '재밌었는가?' '나에게 무언가 교훈을 주었는가?' '현실 사회의 무엇인가를 잘 꼬집었는가?' 등의 요소를 고려한다면 난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가족드라마'라는 장르에 집중한 장르주의적으로도 나에겐 너무나도 실망이었고, 현실의 사회를 고려한 반영론적 관점에서도 지극히 불만이었다.(프랑스 사회가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알바는 아니지. 난 한국에 살고 있으니까)
결국은 또 그놈의 '작가주의' 비평적 관점에서 다루어야 하는데, 나는 작가주의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다.
지극히 내 개인적인 관점이지만,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작가가 아닌 독자와 세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알다시피 축구선수는 수십억대 연봉을 받는다.
사실 그 본질을 파헤치면 그저 공놀이에 지나지 않을 뿐인 이 축구를 조금 잘한다는 것에 어떻게 그렇게나 사회는 큰 값어치를 메기고 평가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관중'이 있기 때문이다. 관중이 있고, 사람들이 봐주고, 그로 인해 수 많은 광고와 홍보가 생기기 때문에 축구선수들은 고평가를 받는 것이다.
과학적으로도 우주의 지평선이란 것이 존재한다. 우주는 우리로부터 더 멀리 떨어질수록 더 빠르게 팽창하고, 이는 공간의 팽창이기 때문에 속도의 제한이 없다. 즉 특정 거리 이상의 지점은 팽창속도가 광속보다 빠르게 되고, 이 지점을 우주의 지평선이라고 한다. 이 우주의 지평선 너머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 정보의 전달의 속도는 결코 광속보다 빠를 수 없기 때문에 공간의 팽창보다 정보의 전달 속도가 느려서 우리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즉, 우리는 그 너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결코 알수 없다. 그렇다면 이 너머의 공간이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전혀 없다. 그 너머의 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에게 닿을 일이 절대! 없기에 그 공간은 의미가 없다.
난 작가와 작품, 그리고 독자와 세상의 관계도 이와 같다고 한다. 그 얼마나 위대한 영혼과 감성, 노력이 담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독자와 세상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 없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라도, 세상에 유일한 걸작이라 하더라도 평생 외부로 공개되지 않은채 다락방 구석에만 쳐박혀있다가 세월의 흔적에 녹슬어 사라져버렸다면, 그것은 우주에 존재한 적이 없는것과 같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느냐도 중요하다.다만 독자가 굳이 그것을 알고싶어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냔 말이다. 가끔 보면 고의적으로 어렵게 쓰고, 좀 있어보이는 척하고 꾸민 것을 고평가하는 일들이 있다. 소위 일반 대중에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대중예술이라고 폄하하며, 자기네들만의 리그에서 평가받는 것을 '고귀하다'라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뭐,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난 적어도 그것을 예술이라 평가하지 않는다. 그저 욕망의 분출물에 불과할뿐.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수준이 낮다'거나 '숨은 뜻을 파헤치려 하지 않는다'고 비난할지 모른다. 뭐 어떠랴. 내가 이렇게 평가하고 생각한다는데. 난 남이 나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내 생각이 이렇다는것이다.
'추락의 해부'로 돌아와서, 난 이 작품에 실망했다. 내가 수준이 낮아서일지, 아니면 작품 자체가 별로여서인지는 모르겠다.(황금종려상 받았다고 해서 그 작품이 정말로 대단한 무언가가 있다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저 권위에 의한 호소일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치면 정신질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했던 전전두엽 절개술은 노벨상도 받았는데 지금도 인정하는 수술이 되어야겠지) 다만, 적어도 내게는 전혀 다가오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내가 여러 작품들, 그리고 나아가 나의 삶에 걸쳐서 중요한 메세지로 삼는 문구를 하나 첨가하며 이 리뷰를 마친다.
It's not Who I am underneath, But What I do that defines me
- Batman begin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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