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2026년 10월 26일 더 현대 서울에서 관람한 <뱅크시 특별전 : BANKST STILL HERE> 관람 후기이다.
뱅크시는 오랫동안 정체를 숨긴 채 활동해 온 영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이자 사회운동가로, 스스로를 '아트 테러리스트'라고 칭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노력해 왔고, 2026년 3월에는 로이터 통신이 오랜 취재 끝에 '로빈 거닝햄'이라는 인물을 뱅크시로 지목하면서 사실상 정체가 드러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당사자가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누구인가보다는 무엇을 남기는가라고 생각한다.
그의 예술관의 핵심은 자본주의와 기존 사회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다. 이를 증명하듯 그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미술관이나 갤러리가 아닌 공공장소에 그려진 그래피티이며, 익명성을 유지하면서 빠르게 작업을 마치고 사라져야 하는 특성상 미리 제작한 판에 구멍을 뚫고 그 사이로 물감을 통과시켜 이미지를 만드는 스텐실 기법을 애용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예술의 지나친 상업화를 조롱하듯 소더비 경매에서 낙찰된 자신의 작품을 미리 설치된 장치를 통해 파쇄해버리기도 했고, 뉴욕 센트럴파크의 노점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진품 작품들을 단돈 60달러에 판매 후 뒤늦게 그 사실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행보에는 분명 자기모순적인 측면도 존재한다. 예술의 공공성과 반상업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정작 자신의 작품 이미지를 상표로 등록하고, 작품의 진위 여부를 인증하는 기관인 '페스트 컨트롤(Pest Control)'을 직접 설립하여 상업적 유통을 통제하기도 한다. 물론 위작과 무단 상업적 이용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기존 예술 시장의 권위와 상업성을 비판하며 "저작권은 패배자들에게나 필요하다" 라고 말한 작가가 스스로 또 다른 권위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은 꽤나 역설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처음 뱅크시의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나는 그다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의 대표작 대부분은 스텐실 기법으로 제작된, 소위 판화에 가까운 형태의 이미지들이고, 그의 예술관과 공공성에 대한 주장을 철저히 따른다면 굳이 전시장을 찾아가 원본을 감상하는 행위가 인터넷에 공개된 이미지를 감상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전에 관람했던 데미안 허스트나 앤디 워홀의 전시와는 조금 다른 맥락이랄까? 그런데 막상 전시가 끝나간다는 소식을 들으니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고, 마침 굿바이 이벤트로 티켓 가격을 50% 할인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국 예매해서 관람하고 왔다.

이번 뱅크시 전시회는 여의도에 위치한 더현대 서울에서 진행되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지하철 5호선 여의나루역에서 접근하는 것이 편리하다. 특히 주말에는 여의도 일대에서 마라톤을 비롯한 각종 행사로 교통이 통제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므로, 자가용보다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전시회는 NOL을 통해 예매 가능하며 현장 구매도 가능하다. 정가는 23,000원인데 굿바이 이벤트로 50% 할인해서 난 장당 11,500원에 예매 완료. 특별히 관람 시간 제한이 되어 있지는 않아서 원하는만큼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다.
관람 후기

전시는 크게 다섯 가지 테마로 구성되어 있었다. 뱅크시의 정체보다 중요한 그의 상징성, 주요 작업 공간이었던 '벽'에 대한 이야기, 블랙유머를 활용한 작품들, 자본주의와 미술 시장에 대한 저항, 그리고 폭력에 대한 비판까지. 각각의 주제로 작품들을 분류한 의도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사실 테마 간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도 적지 않았고, 작품의 제작 시기나 시대적 흐름과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다보니 다소 직관성이 떨어지는 구성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을 관람할 때 눈여겨볼 부분 중 하나인 작품별 출처 및 인증 안내.
뱅크시는 자신이 직접 주도한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상업적 전시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문에 뱅크시의 전시에서는 전시 자체의 '공식성'보다는 개별 작품의 '진위성'과 출처가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된다. 이번 전시 역시 모든 전시품이 뱅크시의 공식 인증을 받은 작품은 아니었다. 뱅크시가 설립한 공식 인증 기관인 페스트 컨트롤 오피스(PCO)의 인증 작품과 공식 판화 제작, 유통 기관이었던 픽처스 온 월즈(POW)의 에디션을 중심으로, 실제 거리의 벽화들을 촬영한 포토 아카이브, 뱅크시가 직접 주도한 프로젝트 현장에서 제작된 오리지널 오브제와 인쇄물인 프로젝트 아카이브, 그리고 초기 실크스크린 제작 방식을 재현한 WCP 판화 아카이브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PCO와 POW 컬렉션까지는 충분히 '진품'의 영역으로 인정할 수 있었고, 조금 더 범위를 넓힌다면 실제 프로젝트에서 사용된 오브제와 인쇄물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벽화를 촬영한 포토 아카이브나 기존 작품을 재현한 WCP 판화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다. 특히 WCP 판화는 원작자의 직접적인 제작 개입이나 공식적인 인증 없이 기존 작품을 재현했다는 점에서, 조금 Rough하게 표현하면 사실상 '카피'나 '짭'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싶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작품들을 전시장까지 찾아가 직접 감상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
물론 뱅크시가 추구하는 예술의 공공성, 그리고 예술은 특정 개인의 소유물이 아닌 모두의 것이라는 사상을 생각한다면 원본과 복제본을 구분하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원작자가 직접 제작하거나 공식적으로 인정한 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단순히 그 이미지를 재현한 결과물을 감상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경험이다. 그리고 애초에 그런 차이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굳이 전시회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와 별개로, 작품 자체에 대한 감상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뱅크시에 대해서는 나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것도 뱅크시 작품이었어?'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들이 적지 않았다. 때로는 유쾌한 첫인상 뒤에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작품도 있었고, 때로는 보자마자 강한 거부감이 들면서도 차마 눈을 떼기 어려운 이미지들도 있었다. 블랙유머와 풍자를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꼬집는가 하면, 때로는 불편하고 직설적인 이미지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의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스텐실 작품뿐만 아니라 '디즈멀랜드(Dismaland)'와 '월드 오프 호텔(The Walled Off Hotel)' 같은 대형 프로젝트의 아카이브 역시 흥미로웠다. 단순히 벽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넘어, 공간 전체를 하나의 예술 작품이자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반체제적인 그래피티 아티스트'라는 뱅크시에 대한 인식을 한층 넓혀준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관람 경험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우선 가장 아쉬웠던 것은 전시의 볼륨이다. 앞서 언급한 WCP 판화나 프로젝트 아카이브 등을 활용했음에도 전체적인 작품 수가 지나치게 적어서 천천히 감상하더라도 30~40분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었다. 물론 뱅크시라는 작가의 특성상 진품 원본을 충분히 확보하기 어려웠을 수는 있겠지만, 기왕 WCP 판화나 프로젝트 아카이브, 포토 아카이브를 활용하기로 한 이상 훨씬 풍성한 구성이 가능할 수 있었을 것 같기에 아쉬움이 남던 포인트. 특히 프로젝트 아카이브의 경우, 의미 없는 스티로폼 전시물을 재현해 놓기보다는 관람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체험형 공간을 마련하거나, 당시 프로젝트 현장을 기록한 영상들을 대형 스크린으로 상영하는 별도의 공간을 구성했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전시장 자체의 구성 역시 아쉬운 점이 많았다. 이전에 관람했던 앤디 워홀 전시에서는 공간의 구성이 작품에 대한 이해와 감상을 도와주는 요소로 작용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오히려 관람을 방해하는 요소로 느껴졌다. 작품 간의 간격부터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어떤 작품들은 지나치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반면, 다른 작품들은 불필요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어 공간 활용이 비효율적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작품에 대한 설명 역시 (별도로 구매해야하는) 도슨트의 해설을 전제로 구성한 것인지, 안내가 지나치게 간략하거나 빈약한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부족한 설명을 보완해 줄 QR 가이드마저 일부는 링크가 만료된 것인지 정상적으로 접속되지 않았고, 접속이 가능한 페이지들 역시 H.Point 앱을 별도로 설치해야만 확인할 수 있었다.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마련된 안내 시스템이 오히려 관람의 불편함을 가중시키는 셈이었다. 물론 더현대 서울에서 진행되는 전시인 만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긴 했지만, 그래도 별도의 입장료를 받는 유료 전시인데 굳이 이런 방식으로 운영했어야 했나...? 적어도 작품 감상에 필요한 기본적인 안내만큼은 별도의 앱 설치 없이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처음 이 전시를 관람할지 고민하게 만들었던 근본적인 질문인, '뱅크시의 작품을 전시장에서 직접 감상하는 것이 인터넷에 공개된 이미지를 보는 것과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 라는 것에 대한 해답이 해결되지 못한 것도 아쉬웠다. 그가 추구하는 예술의 공공성과 반상업주의적 메시지를 고려해 보아도, 실제로 전시장을 찾아 작품들을 감상한 뒤에도 그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전시품 중 상당수가 PCO나 POW의 공식 작품이 아닌 WCP 재현 판화였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결국 '나 이런 전시회를 왔어요~' 라고 자랑하는, 일종의 '지적 허영과 과시'를 제외한다면 과연 무엇이 남는 것일까? 작품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분명 인상적이었지만, 그것을 굳이 이 공간에서, 입장료를 지불하면서까지 감상해야 할 이유는 끝내 찾지 못했다.
물론 모든 전시가 마음에 들 수는 없고, 애초에 큰 기대를 품고 방문했던 전시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선입견을 뒤로하고 직접 관람했음에도 처음의 의문과 아쉬움이 그대로 남았다는 점에서 더욱 씁쓸했다. 뱅크시라는 작가에 대한 지식은 넓어졌지만, 사상에 대한 이해나 공감의 면에서는 아쉬웠던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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