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이스라엘-미국의 마술사 아시 윈드(Asi Wind)의 서적 <레퍼토리 2(Repertoire II)>의 한국어 번역본 리뷰이다.
아시 윈드는 뛰어난 마술사이자, 데이비드 블레인을 비롯한 정상급 마술사들의 컨설턴트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마술 스타일과 그가 지향하는 방향성에 대해서는 이전 <레퍼토리>를 리뷰할 때도 이미 충분히 설명한 바 있다.
2018년 <레퍼토리>를 출간 이후, 전 세계 마술사들은 오랫동안 그 후속작을 기다려왔다. 그리하여 2024년 발매된 이 책에는 25가지의 신작 테크닉과 루틴들이 실려있는 책이다. 그리고 2024년, 마침내 출간된 이 책에는 25가지의 새로운 테크닉과 루틴이 수록되어 있다. 이하의 리뷰는 전작과 동일하게 박민법 마술사의 번역과 PH의 감수를 거친 한국어 번역본을 기준으로 진행한다. 가격은 20만 원이며, 150페이지 분량의 하드커버 서적과 더불어 PH가 본서에 수록된 마술들에 대한 코멘터리를 담은 약 1시간 20분 분량의 영상 역시 함께 제공된다.
<레퍼토리 2> 리뷰
본격적인 리뷰에 앞서,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비슷한 계열의 원리로 묶인 루틴들이 일부 존재하긴 했지만, 대다수가 서로 다른 형태의 루틴을 보여주었던 전작 <레퍼토리>와 달리 이번 <레퍼토리 2>는 크게 두 가지 테마에 집중한다. 바로 'XY Deck'과 'Card to Box' 챕터다. 이 두 챕터에서는 각각 하나의 핵심적인 컨셉과 아이디어를 제시한 뒤,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응용 방식과 루틴들을 확장해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번 리뷰 역시 책의 서술 순서와는 다르게, 이 두 챕터를 먼저 다룬 뒤 나머지 루틴들 중 인상적이었던 몇 가지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언제나처럼 연출 설명은 해법이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비마술인 관객의 시각을 기준으로 서술하도록 하겠다.
XY Deck
설명) 새로운 방식의 스트리퍼 덱의 소개, 그리고 그 활용법
스트리퍼 덱(Stripper Deck)은 단언컨대 가장 위대한 트릭 덱 중 하나다. 스트리퍼 덱은 덱 자체에 카드 컨트롤과 폴스 셔플의 기능이 내장되어 있어, 마술사의 역량에 따라 활용 범위가 무궁무진한 트릭덱이지만, 관객이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섞게 만들기 어렵다는 명확한 한계 역시 존재한다. 이번 <레퍼토리 2>의 'XY Deck'은 이러한 단점을 보완한 덱이다. 기존 스트리퍼 덱보다 직접 제작하기도 훨씬 간편한 데다, 관객이 직접 덱을 자유롭게 섞어도 된다는 점에서 활용 폭이 더욱 넓다. 나아가 전체 덱을 색상이나 문양과 무관하게 원하는 기준으로 세팅할 수도 있고(ex. 홀수 카드와 짝수 카드 분리), 전체 덱이 아니라 특정 카드 패킷(ex. 스페이드 A부터 K까지)만 별도로 세팅하는 것도 가능해, 연출자의 취향에 맞춰 매우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책에서는 기본적인 덱 제작 방법을 설명한 뒤, 세 가지 스트립 아웃 메소드를 먼저 소개한다. 덱 제작 자체는 약 5분 정도면 충분하며, 무엇보다 자신의 스타일에 맞춰 덱의 난이도를 조정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난이도를 높일수록 관객이 카드를 한 장씩 확인하더라도 위화감을 느끼기 어려워지지만, 반대로 스트립 아웃 무브 자체의 난도 역시 꽤 올라간다. 충분한 연습 없이 시도하거나 제작 과정에서 덱의 상태가 균일하지 않으면 한두 장씩 미스가 나기 쉽다. 따라서 처음에는 비교적 쉬운 버전으로 충분히 감각을 익힌 뒤, 실전에서는 중간 난이도 혹은 상급 난이도로 넘어가는 방식을 추천한다.
XY 덱의 응용 루틴으로는 세 가지 방식이 소개된다. 바로 Out of This World, Shuffle-Bored, 그리고 Anybody & Nobody이다. 세 연출 모두 원안 자체가 이미 훌륭하지만, XY 덱을 활용하면 복잡한 손기술이나 별도의 세팅 없이도 관객이 직접 섞은 덱으로 해당 루틴을 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특히 Shuffle-Bored는 기존 버전 및 여러 바리에이션들이 지니고 있던 다소 어색한 핸들링 제약이나 스택 덱 사용 없이도, 상당히 디테일한 수준의 예언 효과를 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마추어는 물론 프로 공연자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루틴이라 느껴졌다. 더불어 Anybody & Nobody 루틴의 아이디어 역시 훌륭했다. XY 덱을 활용한 메인 방식 자체도 훌륭했지만, 책에서는 특정 인물의 이름을 포스하기 위해 프리쇼나 어시스턴트 없이 활용할 수 있는 별도의 방법 역시 소개한다. 이 아이디어 또한 캐주얼 환경에서 공연하는 마술사들에게 꽤 유용한 팁이 될 것 같아, 한 번쯤 눈여겨볼 만한 부분이었다.
Card to Box
기술 : 관각들이 사방에서 둘러싸도 각도 제한 없이 카드 박스 안으로 카드를 이동시키는 기술
우선 이 기술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방식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난이도 역시 상당한 편이다. 깔끔하게 수행되지 않을 경우 기술이 이루어지는 순간 관객이 이를 눈치챌 가능성도 분명 존재한다. 다만 기존의 수많은 카드 투 박스 루틴이 주로 팜에 의존하며, 팜 기반의 Card to Box 루틴은 카드가 실제로 상자 안에서 등장하는 모습을 천천히 자연스럽게 보여주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는데, 이 방식은 마술사의 직접적인 터치 없이 훨씬 더 클린하게 카드가 상자 안에서 나타나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반드시 상자일 필요 없이 지갑이나 패드처럼 카드를 잠시 가릴 수 있는 물체라면 응용이 가능하며, 무엇보다 기술이 사용되는 타이밍 자체가 관객의 인지보다 한 발 앞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즉, 관객이 효과를 인식하기 전에 이미 핵심 동작이 끝나 있기 때문에 상당히 강한 메리트를 가진다.
연출 파트에서는 이 기법을 활용한 다양한 루틴들이 소개되는데,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두 가지를 꼽자면 'Think Twice'와 'C2B Prediction'이다. Think Twice는 관객이 생각한 두 장의 카드가 상자 안에서 등장하는 루틴인데, 단순히 기술을 두 번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객이 중간에 마음을 바꾸더라도 마술이 계속 진행된다는 구조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C2B Prediction은 첫 번째 관객이 뽑은 네 장의 카드가 두 번째 관객이 선택할 카드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마지막에는 카드 자체가 변화하는 구조를 가진다. 난이도는 높은 편이지만, 성공적으로 수행된다면 ‘우연처럼 보였던 모든 과정이 사실 하나의 예언이었다’는 인상을 강하게 남길 수 있어, 운명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특히 매력적이었다. 더불어 PH의 코멘터리 영상에서는 추가적인 기술과 결합한 응용 방식도 소개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버전이 가장 깔끔하게 느껴져 현재 가장 선호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Mental Fan Force
기술 : 관객이 '그냥 생각만 했다'고 믿게 만드는 포스 기법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클래식한 팬 포스(Fan Force) 기법을 아시 윈드 스타일로 변형한 버전이다. 난이도 자체가 아주 높은 편은 아니며, 완전히 심리적인 접근에 의존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일정 부분 물리적인 요소 역시 결합되어 있어 의외로 성공률도 꽤 높은 편이다. 다만 그렇다고 성공률이 100%라고 보기는 어렵고, 개인적으로는 포스가 이루어지는 전체적인 그림이 아주 자연스럽거나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으며 다소 뻔하게 보일 수 있는 지점도 존재한다고 느꼈다. PH나 아시 윈드는 이 기법을 'Think of a Card'나 ACAAN 루틴에 사용한다고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루틴에서 굳이 이 방식을 선택해야 할 만큼의 뚜렷한 메리트가 있는지는 다소 의문으로 남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 방식의 멘탈 팬 포스보다는, 확실한 성공률이 필요할 때는 컬 포스나 리플 포스를, 조금 더 볼드한 선택이 가능하다면 타이밍 포스나 클래식 포스를 사용할 것 같다.
Noah
연출 : 4단계의 멀티페이즈 루틴. 임의로 뽑은 두 카드가 쌍둥이 카드(같은 값, 같은 색깔)가 매칭되는 것이 2번 일어난다. 이번에는 무작위로 선택한 두 카드를 덱 사이에 넣고 섞었는데 우연히 두 카드가 나란히 정렬된다. 마지막으로 신호를 주면 덱 전체가 같은 값의 카드끼리 나란히 정렬된다.
에드 말로(Ed Marlo)의 'A Matching Routine'을 변형한 버전이다. 멀티 페이즈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당히 긴 호흡을 가져가는 형태로, 연출 특성상 초반 세팅만 안정적으로 끝내면 이후 단계들은 거의 셀프워킹에 가깝게 흘러간다는 장점이 있고, 전체 액트의 피날레로 사용하기에도 충분한 파워를 지닌 루틴이다.
다만 문제는 그 초반 세팅 과정이다. 준비 과정이 상당히 길고 복잡하며, 초심자 입장에서는 이 과정 자체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 느껴졌다. 특히 피날레 루틴이라는 특성상 덱 스위치 없이 다른 카드 마술을 보여준 뒤 자연스럽게 이어서 진행하려면 사실상 반덱 컬 수준의 준비가 기본적으로 요구되기에 부담이 더욱 크다. 또한 결말부에서는 쌍둥이 카드들이 나란히 배열된 형태로 디스플레이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최종적인 그림이 아주 아름답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차라리 이 정도의 선행 과정을 감수해야 한다면, 후안 타마리즈 마술사의 토탈 코인시던스이나, 이를 기반으로 변형한 엄준혁 마술사의 코인시덴시아 토탈 루틴 쪽이 개인적으로는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Gang Of Four
연출 : 관객이 잘 섞은 덱을 돌려받아 뒤죽박죽 섞은 후 신호를 주면 덱이 모두 정렬된다. 관객이 정렬된 덱 중 한 장의 카드를 선택하고 그 카드를 뒤집어 덱에 넣는다. 신호를 주면 관객이 고른 카드와 같은 값을 가진 카드 4장만 앞면이고, 나머지는 모두 뒷면이다.
다니 다올티즈(Dani Daortiz) 마술사의 'Twin Souls' 마술사의 바리에이션 버전이다. 원안에서 필요하던 세팅 과정을 최소화시킨 것이 특징이며, 특히 2페이즈 구조로 진행되는 루틴에서 첫 번째 페이즈를 진행하는 과정 속에 두 번째 페이즈를 위한 세팅이 자연스럽고 교묘하게 녹아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두 번째 페이즈에서는 특정 카드를 포스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멀티플 아웃과 다양한 아이디어를 활용하는 방식 역시 꽤 흥미롭다. 루틴 자체도 충분히 완성도가 높아 실전 퍼포먼스용으로 활용하기 좋아 보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이 두 번째 단계에서 소개되는 아웃 처리 방식이 다른 루틴에도 응용하기 좋아 보여 더욱 인상 깊었던 파트였다.
3D telepathy & Center Burn
연출 : 세 명의 관객이 각각 종이에 적은 세 가지 정보를 모두 정확히 맞혀내는 마술
전형적인 빌렛을 활용한 멘탈 루틴이다. 센터 티어, 스위치, 미스 콜, 원 어헤드 프린시플 등 대다수의 빌렛 루틴에서 자주 활용되는 핵심 기법들이 복합적으로 사용된다. 그렇기에 완전히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는 루틴이라기보다는, 멘탈리즘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전체 구조를 훑어보며 정리해볼 만한 루틴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이 루틴과 비슷한 형태인 4D Telepathy를 이전에 료 마술사님 수업에서 배운 적이 있었는데, 언젠가 꼭 실전에서 퍼포밍해보고 싶은 루틴이라 지금도 주기적으로 연습하고 있기도 하다. 더불어 Center Burn 파트의 경우 별도의 설명 없이 사진만 수록되어 있는데, 그럼에도 아이디어 자체는 매우 간단하면서도 기발했다. 빌렛을 실제로 태우는 연출을 자주 사용하는 퍼포머라면 한 번쯤 참고해볼 만한 팁이라 생각한다.
종합 및 총평
실전적인 아이디어들로 가득찬
전작에 결코 뒤지지 않는 훌륭한 후속작
전작 <레퍼토리>에 이어 이번 <레퍼토리 2> 역시 굉장히 만족스러운 서적이었다. 전작이 하나하나 완성된 루틴을 세밀한 디테일까지 짚어가며 설명하는 방식에 가까웠다면, 이번 작품은 보다 다양한 루틴에 응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데 더욱 집중하고 있다.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XY 덱과 Card to Box 파트는 물론이고, 그 외 멘탈 팬 포스, 인덱스 카드 활용법, 멀티플 아웃 설계 방식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던져주기 때문에 꼼꼼히 읽는 독자라면 분명 얻어갈 것이 많다고 느낄 만하다.
PH의 코멘터리 영상 역시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전작만큼 강렬한 아이디어나 변형 핸들링이 쏟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책의 전체적인 흐름을 따라가며 완독을 돕는 훌륭한 보조 수단 역할을 한다. 개인적으로는 책의 특정 파트를 먼저 읽은 뒤, 해당 파트의 PH 영상을 보고 다시 읽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지루함 없이 끝까지 완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번역의 아쉬움은 전작보다도 더 크게 느껴졌다. 단순한 오타나 어색한 문장 수준을 넘어, 일부 루틴은 PH 코멘터리를 보기 전까지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또한 레퍼토리 시리즈 특유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이번 책에 수록된 상당수 루틴은 캐주얼 퍼포밍보다는 공연 환경에 더 최적화되어 있다. 이번 리뷰에서 다루지 않은 'Meant to Be', 'Tamed Name'은 대표적인 공연용 루틴이며, 'Ex Nihilo', 'Noah', 'Anybody & Nobody' 역시 캐주얼 환경에서도 가능하긴 하지만 공연 무대에서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연출들이다. 물론 이러한 루틴들을 통해 마술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접근법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장점이다. 다만 대다수 독자가 실제로 바로 활용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루틴도 적지 않기에, 실전성 측면에서는 호불호가 갈릴 여지도 있다. 특히 메인 테마인 XY 덱과 Card to Box 파트가 상대적으로 캐주얼 퍼포밍 친화적이다 보니, 나머지 파트에서 이러한 대비가 더 크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하다.
종합하면, 이번 작품 역시 '전작에 결코 뒤지지 않는 훌륭한 후속작'이었다. 읽는 재미 역시 충분했고, 수록된 아이디어들의 활용 여지도 넓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높은 밀도와 완성도를 갖춘 책이라는 인상이다. 아시 윈드 스타일의 마술을 좋아하는 사람, 새로운 방식의 스트리퍼 덱 활용법이나 Card to Box 루틴에 관심 있는 사람, 그리고 복잡한 준비 없이 활용 가능한 공연용 마술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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