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서론
시계생활을 본격적으로 한지 10년이 조금 안된 것 같다.
그동안 이래저래 많은 시계들을 경험해왔다. 수개월 이상 가지고 있던 시계들은 시계사용기로 글을 남기기도 했지만, 짧게는 이틀에서 길게는 6개월 미만으로 가지고 있던 시계들까지 포함하면 거진 서른 개에 육박할 것이다. 어차피 시계를 올릴 손목은 하나라는 그럴듯해보이는 이유와 더불어 자금난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며 많은 시계들을 들이고 내치면서 왔던 것 같다.
그동안 여러 시계를 경험하며 시계 컬렉팅(이라는 말을 쓰기에도 조금 부끄럽지만)의 관점이 바뀐 것 같다.
시계 생활에 입문할때에는 중요하게 여겼던 많은 요소들이 이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기도 하고, 처음에는 생각치도 않았던 요소들이 지금은 필수적인 요소들이 되기도 한 것 같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한번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아름다움
시계에 입문할때 가장 중요시여기던 것은 시계의 아름다움이었다. 이 시기를 대표할 수 있는 시계가 바로 위의 오메가의 아쿠아테라.
당연히 지금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입문할때만 해도 결국 예쁘면 좋자나! 라는 생각이 제일 컸던 것 같다.
아무래도 시계의 역사니, 스펙이니, 마감이니, 유지보수니 하는 것은 전혀 모르던 시기이기도 했고, 당시에는 '손목시계는 남자에게 허용된 비싼 악세사리' 라는 생각도 컸던 것 같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어쩌면 시계 그 자체를 가장 좋아했던 시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 하루종일 손목 위의 시계를 보기도 했고, 시계 사진을 제일 많이 찍었던 시기도 이때인 것 같다. 이렇게 시계를 점차 좋아하다보니 이런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여러 커뮤니티들을 가입하기도 하고, 정보를 얻어가기 시작했는데 그러다보니 두번째 시기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2. 스펙과 마감
두번째 시기는 스펙과 마감에 집착하던 시기였다. 대표적인 시계가 브레게의 5907.
시계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알아갈수록 세간에서 말하는 여러 기준들을 나도 모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브랜드의 정체성과 근본력에 대한 생각 / 인하우스 무브먼트의 탑재여부 / 케이스와 러그의 처리방식 / 무브먼트의 마감 등등...
그중에서도 제일 많이 고려했던 요소가 마감이었다. 모름지기 고급시계라면 보이지 않는 곳이나 작은 부분도 하나하나 정성들여 꾸미고 치장해야한다는 생각을 한 것도 이때다.
시계 생활을 가장 열심히 한 시기이기도 하다. 타임포럼 및 와치홀릭 등 국내 커뮤니티 뿐만 아니라 와치유식, 레딧 등 외국 커뮤니티 등에서 열심히 활동하며 정보를 얻기도 하고, 누군가가 시계를 분해하여 루빼로 확인 후 처리되지 않은 부분들을 지적하면 그에 환승하여 같이 열심히 특정 브랜드를 까기도 했었다. 태그호이어를 호구호이어라고 부르기도 했고, 롤렉스는 그 돈값어치를 못하는 시계라고 까기도 했으며, 예거는 하이엔드라기에는 마감처리가 너무 미흡하다고 욕하던 것도 이시기.
그러나 이런 생활은 결국 한계를 마주하게 되었다.
시계 자체를 즐기는게 아니라 시계공부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 어떤 시계를 봐도 그 시계 자체를 좋아하기보다는 단점들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계를 평가하는 기준들이 과연 내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고, 내가 당시 정말 신경 쓰던 마감조차도 '루빼를 끼고 봐야만 보이는, 실생활에서는 전혀 체감되지 않는 단점들이 과연 단점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 이후로는 크게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남이 정한 기준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내가 즐길수 있는 기준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고, 이러한 생각들은 나의 시계 생활의 다음 챕터로 이끌게 하였다.
3. 확고한 취향과 시계 본연의 가치
내가 스스로 좋아하는 기준을 알기 위해 처음으로 한 것은 바로 시계를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지금은 가격이 많이 오르긴 했지만 당시에는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시계 전반의 원리와 제작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곳들이 몇몇 있었고, 나도 그중 Time Lab의 시계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시계에 대하여 배웠다. 시계의 원리에 대해서 배우고, 직접 무브먼트를 분해 및 조립해보기도 하며, 내 취향에 맞게 시계를 커스텀하여 만들기도 하면서 내가 시계에서 좋아하는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더불어 시계가 가지는 본연의 가치에 대해서 조금더 생각하게 되었다.
달착륙 시계인 문워치, 에베레스트 등정 기념 익스플로러 등 각 브랜드에서 홍보하는 헤리티지도 좋지만, 그 헤리티지가 나의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헤리티지를 보고 내가 행복함을 느끼고 즐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결국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이러한 홍보문구 등에 덜 신경쓰게 되었다. 대신 지금은 단종되어 사라졌더라도 여러가지로 찾아보고 정말 내가 즐길 수 있는 시계를 찾게 되었다. 브레게 (구)마린, 바쉐론 구형 오버시즈, 파텍필립 5196 등 지금은 단종되었더라도 그 자체가 잘 만들어진 걸작을 경험하게 된 것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한 후였다.
그러나 이도 끝이 아니었다.
다양한 취향과 기준을 확고히 세우면 세울수록 내가 원하는 시계들을 찾기가 더 어려워졌고, 그렇게 구한 시계들은 역설적이게도 한두가지 조건의 부족함이 나를 괴롭게 하였다. 나아가 시계 자체의 가치가 높고 좋은 시계들이라 할지라도 정작 내 손목위에서는 그러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시계를 내가 차는 것이 아니라 시계를 내가 모시고 사는 듯한 느낌까지 들기 마련이었다.(랑에 삭소니아 씬이라던가, 브레게 마린이라던가..)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던 도중 나는 어떤 한 시계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는데..
4. 결국은 편한 시계. 그거면 충분
바로 위 시계인 L.Eruditio & Veritas 의 시계이다. 이름조차 낯선 이 시계는 예전 단종된 AP 사의 무브먼트들을 가져와 중국인 시계 제작자가 만든, 소위 근본없는 시계였다. 그럼에도 나는 이 시계를 보고 대단히 감명받았다. 적당한 피니싱과 가공, 오묘한 다이얼 등 다양한 요소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손목 위에서 너무나도 조화롭게 잘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가볍다거나, 다이얼 사이즈가 작다, 소재가 스틸이다 등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에게 잘 맞는 시계. 내가 편히 찰 수 있고, 내가 나임에 좀더 집중할 수 있는 시계. 내가 시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시계가 나에게 맞춰줄 수 있는 시계. 즉 정말로 편하고 나에게 잘 '맞는' 시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들에 의해서 특정 시계가 나에게 잘 맞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시계는 시계일 뿐,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생각이 든 순간, 나는 비로소 많은 것을 내려놓고 정말로 시계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시계가 무브먼트를 범용을 쓰면 좀 어떤가? 적당히 시계보는데에만 지장 없으면 되지.
무브 데코레이션이 별로야? 뭐 어때. 보이는 곳만 예쁘면 되지.
역사가 없고 근본없는 디자인의 짬뽕이야? 뭐 어때. 내 스타일이면 되지.
방수가 30m야? 뭐 어때. 물 좀 적당히 튀기만 하면 되지.
등 기존에는 중요하게 생각했던 요소들이 실제로는 그저 비교를 위한 비교이거나 굳이 만들어낸 불편감이란 생각이 들게 되었다.
결국 좋은 시계를 구분짓는것은 오로지 '나에게 잘 맞는가'라는 것이고, 멋진 시계를 가지기 위해선 내가 더 멋지게 되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나는 아직 충분히 멋진 시계를 가지지 못한 것 같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더 멋질테니까.
'시계 > 시계 관련 생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계 라인업의 구성 - 나의 선택들 (1) | 2024.11.30 |
---|---|
시계 라인업의 구상에 있어서 생각해볼 요소들 (3) | 2024.11.17 |
'시계'를 취미로 한다는 것에 관하여 (2) | 2024.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