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년필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만년필 브랜드로 몽블랑이나 라미 정도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애호가들 사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바로 펠리칸(Pelikan)이다. 펠리칸은 독일을 대표하는 필기구 브랜드 중 하나로, 1929년 특허받은 차동 피스톤 필러 방식을 적용한 만년필을 세계 최초로 선보이며 만년필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디자인 역시 다른 고급 만년필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몽블랑 마이스터스튁처럼 양쪽 끝으로 갈수록 둥글게 좁아지는 전형적인 시가형 실루엣과 달리, 펠리칸 만년필은 캡과 배럴의 끝이 평평하게 마무리된 원통형 디자인(=플랫탑 디자인)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여기에 배럴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특유의 스트라이프 패턴이 더해져, 멀리서 보아도 펠리칸임을 비교적 쉽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뚜렷한 개성을 지닌다.
펠리칸의 대표적인 고급 라인업은 소버렌(Souverän) 시리즈다. M400을 시작으로 M600, M800, M1000 순서로 크기와 닙의 크기가 점차 커진다. 그중 M800은 M1000 바로 아래에 위치하는 상급 모델이다. M1000이 압도적인 크기와 부드러운 대형 닙을 앞세운 최상위 모델이라면, M800은 적당한 크기와 묵직한 무게, 안정적인 균형을 고루 갖추고 있어 펠리칸을 대표하는 모델로 자주 거론된다. 개인적으로도 단순히 크기만 큰 모델보다는 실제 필기에서의 균형감이 좋은 M800 쪽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번에 구매한 크림 블루는 2024년에 선보인 스페셜 에디션이다. 펠리칸을 상징하는 세로 스트라이프 패턴 대신 짙은 남색 배럴과 부드러운 크림색 캡을 조합해, 기존 소버렌과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 사실 처음 M800을 구매하려고 했을 때는 온고잉 모델의 대표격인 금장 그린 스트라이프나, 은장 장식과 차분한 회색 스트라이프가 어우러진 M805 슈트레제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크림 블루 특유의 색상 조합과 스페셜 에디션이라는 희소성에 마음을 빼앗겼고, 무엇보다 실물이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워 국내 재고가 풀리자마자 곧바로 구매를 결정했다.



M800 크림 블루의 배럴은 짙은 남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펠리칸은 만년필 애호가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홍보팀이 안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제품 사진이 실물의 매력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기로 유명한데, 이 모델 역시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사진보다 실물에서 훨씬 깊고 풍부한 색감을 보여준다. 캡과 피스톤 노브에 사용된 크림색도 밝고 화사한 아이보리보다는 톤다운된 베이지색에 가깝다. 덕분에 개성 있는 색상 조합이면서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부담스럽지는 않아, 일상에서 사용하기에 딱 적당한 균형을 갖추고 있다.
클립은 브랜드명의 어원이기도 한 펠리칸의 부리를 형상화했으며, 캡탑에는 어미 펠리칸과 새끼 펠리칸을 표현한 상징적인 로고가 새겨져 있다. 최신 모델인 만큼 둥지 속 새끼 펠리칸은 한 마리다. 초기 로고에는 네 마리의 새끼가 그려져 있었지만 1937년 두 마리로 줄었고, 2003년부터는 현재와 같은 한 마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를 두고 펠리칸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날이 갈수록 QC관리가 안되는 펠리칸의 현실에 빗대어 회사가 기술자를 한 명씩 해고할 때마다 로고 속 새끼 펠리칸도 한 마리씩 사라진다는 농담을 하고 있다.

말이 나온 김에 보증 정책에 대해서도 한번 짚고 넘어가겠다. 현재 국내에서 펠리칸은 오로라, 플래티넘과 함께 신한커머스가 공식 수입을 담당하고 있으며, 공식 수입 제품과 병행수입 제품의 사후 서비스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공식 수입 제품은 닙 평생 무상 교정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보증기간 3년 이내에 캡이나 배럴이 손상된 경우에도 무상 교환이 가능하다. 따라서 가격 차이가 어느 정도 있더라도 병행수입 제품보다는 정식 수입 제품을 구매하는 것을 권장한다.
일부에서는 국내 공식 수입 여부나 보증서의 유무와 관계없이 정품이라면 월드 워런티를 적용받을 수 있는 몽블랑과 비교해 아쉽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월드 워런티를 내세우면서도 국내 공식 보증서가 없으면 접수조차 받아주지 않는 시계 브랜드를 워낙 많이 겪어본 탓인지, 이 정도면 상당히 훌륭한 사후 서비스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만년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닙을 살펴보자. 18K 금닙임을 나타내는 각인과 닙 사이즈, 그리고 펠리칸 로고가 새겨져 있어 깔끔한 밸런스의 투톤 금닙을 보여준다. 다만 한정판 모델임에도 일반 온고잉 모델과 동일한 닙 각인을 사용한다는 점은 다소 아쉽다. 한정판을 구매하는 소비자 입장에서는 닙에서도 특별한 요소를 기대하기 마련인데, 각종 에디션과 한정판마다 화려한 전용 각인을 적용하는 몽블랑과 비교하면 이러한 아쉬움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반면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분명한 장점도 있다. 펠리칸은 닙과 하우징이 결합된 유닛을 별도로 판매하기 때문에, 원한다면 닙 사이즈를 비교적 간편하게 교체할 수 있다. 특히 현행 모델과 동일한 닙을 사용하는 만큼 한정판 전용 닙을 구하기 위해 높은 비용을 부담하거나 오랜 기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점은 오히려 장점으로 볼 수도 있다.
펠리칸 닙은 한때 품질 관리가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특히 닙의 좌우 분할이 5:5가 아니라 3:7이나 2:8에 가까울 정도로 크게 어긋난 사례도 심심치 않게 보여 악명이 높았다. 다행히 내가 받은 제품은 좌우가 비교적 고르게 나뉜 양호한 분할을 보여준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약간의 단차가 확인되기는 하지만, 실제 필기에서는 크게 체감되지 않아 이 부분 역시 만족스럽다.

다른 펜들과 필기 굵기를 비교해 보면 펠리칸 EF닙의 특징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유럽제 닙은 일본제 닙보다 굵게 써지는 편이며, 그중에서도 펠리칸은 같은 표기 굵기라 하더라도 비교적 두꺼운 선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펠리칸 EF닙은 제품마다 편차가 큰 편이라, 어떤 경우에는 같은 펠리칸의 F닙과 비슷하거나 심지어 M닙에 가까울 정도로 굵게 써지기도 한다. 다행히 내가 받은 닙은 비교적 EF에 가까운 굵기를 보여주어 이 부분은 만족스럽다.
필감 역시 훌륭하다. EF닙인 만큼 종이의 결이 느껴질 정도의 가벼운 사각거림은 있지만, 거칠게 종이를 긁는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잉크 흐름도 상당히 풍부해 세필임에도 선이 막힘 없이 시원하게 뻗어나간다. 전체적으로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이른바 ‘버터 필감’에 가깝지만, 지나치게 미끄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적당한 피드백이 남아 있어 글씨를 쓰는 맛도 충분하다. 여러모로 상당히 마음에 드는 필감이다.
피스톤 필러의 작동감과 투명 잉크창 역시 상당히 마음에 든다. 피스톤 필러 방식을 최초로 상용화한 브랜드답게, 노브를 돌릴 때 느껴지는 부드럽고 정교한 감각은 다른 브랜드에서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펠리칸만의 장점이다. 투명 잉크창도 전체적인 디자인의 균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꼭 필요한 만큼만 드러나 있다. 남은 잉크량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하면서도 외관상 지나치게 도드라지지 않아, 디자인과 실용성을 모두 만족시킨다. 단순히 외형만 아름다운 한정판에 그치지 않고, 실제 사용하는 과정에서도 만족감을 주는 요소다.

종합하면, 만년필 명가의 명성에 걸맞은 훌륭한 제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른바 ‘몽·펠·파’로 불리는 3대 브랜드의 대표 모델다운 완성도와 필기 성능을 두루 갖추고 있으며, 현재 내게는 몽블랑 에드거 앨런 포 에디션과 함께 가장 아끼는 만년필 중 하나다. 들인 지는 아직 얼마 되지 않았지만, 외형적인 아름다움은 물론 실사용 면에서도 높은 만족감을 주는 만큼 앞으로 오랫동안 함께할 좋은 친구가 될 것 같다.
Pelikan Souverän M800 Cream Blue Special Edition Fountain Pen
Ref No. 827256
출시 연도 : 2024년 10월
충전 방식 : 피스톤 필러
배럴 : 미드나이트 블루 레진 배럴, 크림색 레진 캡·그립부·피스톤 노브
닙 : 18K 투톤 금닙(EF)
길이 : 141mm(캡 제외시 127mm)
배럴 최대 직경 : 13.5mm
잉크 제외 무게 : 28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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