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만년필 취미에 푹 빠져있다.
평생 필기구, 특히 만년필에 관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내가 이 취미에 빠져든 것을 생각해보면 어떤 면에선 신기하기도 하다.
내가 만년필을 처음 접한 것은 20여년전 학생 때이다.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만년필 입문기로 손꼽히는 '라미 사파리' 만년필을 선물받아 사용했었다. 선물 받은 것이니만큼 일상에서 소위 전투용으로 쓰기 위해 나름 열심히 사용했지만, 쓰면 쓸수록 내겐 너무나도 불편한 도구였다. 잉크를 수시로 채워야 했고, 마르는데에도 시간도 오래 걸렸으며, 심지어 아무 종이에나 쓸 수도 없고 잘 번기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러던 중 결국 제대로 뚜껑을 닫지 않은 상태에서 필통에 넣었다가 잉크가 새어 버렸고, 나의 필통과 가방은 온통 잉크 천지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만년필과 멀어지고, 이후 20여년간 오로지 볼펜만을 나의 필기구로 사용해왔다.
그런 내가 만년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얼마 전 우연히 카페에서 마주친 어느 노인 때문이었다.
소위, 영화나 소설 속의 인물처럼 품격 있는 신사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책을 펼쳐 놓고 천천히 노트에 글을 적는 그의 모습은 내게 이상하리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바쁘게만 흘러가는 현대 사회속 잊고 지내던 무언가를 발견한 느낌이랄까. 세상의 속도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시간을 묵묵히 살아가는 장인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장면은 내게 꽤 큰 충격으로 남았고, 그 길로 나는 만년필에 대해 하나씩 찾아보기 시작했다.
사실 돌이켜 보면, 이 관심이 갑작스러운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이패드에 필기하기보단 종이 노트에 필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애플워치보단 기계식 시계를 즐겨차며, LP도 즐겨 듣는 나의 마음 속 어딘가에는 디지털보단 아날로그에 대한 선망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요즘 바쁘게 공부중이다. 만년필에 관련된 서적을 찾아보기도 하고, 블로그나 유튜브에 올라온 리뷰들을 보기도 하며, 마음에 드는 책 한권을 골라 통필사도 하고 있다. 덕분에 평생의 컴플렉스였던 악필도 조금씩 교정해 보고 있다.
물론 내 열정은 언제나 짧고 굵게 타올랐다가 식어버리곤 하기에, 언제까지 이 취미가 이어질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시계나 마술처럼 나와 평생 가는 좋은 취미가 되어줄지도 모르기 때문에, 적어도 나의 열정의 불씨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곳에나마 열심히 기록을 해보고자 한다. 나는 만년필 전문가도 아니고, 앞으로 그럴 생각도 없다. 그저 한 명의 취미인으로서 직접 써 보고, 느끼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얻은 경험들을 솔직하게 기록해 보고자 한다. 혹시 이 글들이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가 만년필이라는 취미에 첫발을 내딛는 데 작은 도움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