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은 참 미묘한 취미이다.
살면서 한두번 접해보긴했지만 대부분이 그 해법을 본격적으로 파고 들려고 하거나 연습해서 남들에게 시연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소위 비주류 취미에 속한다는 것.그래서 그런지 마술을 볼 기회가 생기면 다들 그 순간에 집중해서 보는 것 같다. 유튜브를 보다가 알고리즘에 뜬 마술 쇼츠에 달린 많은 댓글, 길거리 버스킹 마술사들 주변에 모인 수많은 인파를 보다보면 이런 나의 생각에 더 확신이 생긴다.
나도 마술을 잘한다고는 빈말로도 할 수 없는 아마추어 수준이지만, 주변에 마술을 공부한다는 것을 하도 이야기하고 다녀서인지 마술을 보여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곤 한다. 그럼 대부분 빼지 않고 보여주는 편이다. 나름 학원수강까지 하면서 배웠던게 아깝기도 하고, 마술은 방구석의 기술연습이 아닌 관객과의 소통으로 완성된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가방에 네모니카 스택으로 세팅된 노말덱 하나와 마킹덱 하나, 임프레션 패드와 빌렛 몇장을 들고다니기도 했다. 카드를 두고다닐 경우를 대비해서 각종 휴대폰 마술을 위한 앱들을 깔기도 했고, 신용카드 / 볼펜 / 테이크아웃 커피컵 슬리브 등 다양한 도구를 이용한 생활 마술도 열심히 연습했다. 소위 언제 어디서나 마술을 보여줄 준비를 해왔고, 모름지기 마술을 한다는 사람이라면 이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마술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요청받았을 때 무조건 마술을 보여줘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건 아무래도 심적 / 물적 에너지 소비. 아무리 가벼운 마술이라도 언제든지 시연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준비와 감을 잃지 않기 위한 연습이 필요하다. 각잡고 보여주는 자리가 아니라 임프롬투하게 요청 받아서 마술을 시연할 일이 한달에 많아야 한번 있을까말까 한 것을 고려하면 상당한 낭비. 게다가 막상 그런 요청을 받더라도 직전까지 연습을 했거나 요청받을 것을 예상한 것이 아니라면 막상 시연하는 마술의 형태나 퀄리티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가장 익숙한 형태의 마술을 하기 마련이니 매번 비슷한 플롯의 연출만을 하기 마련이었고, 그마저도 상황에 따라 실수가 더해지면 스스로에게도 자책감까지도 들었다. 마술을 좋아하여 마술을 언제 어디서나 보여주겠다는 나의 생각이 오히려 나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한 셈이다.
마술이 본업도 아닌 내가 마술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수는 없기에 고민만 늘어가던 중 한 프로 마술사분과의 대화에서 눈이 번뜻 뜨이게 되었다. 한 렉처쇼가 끝난 후 질의응답시간에서 평소 준비되지 않은 자리에서 가볍게 마술을 보여주기 위해 EDC(Every Day Carry)하는 마술도구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준비되지 않은 자리에서 마술을 절대 시연하지 않습니다.
프로 마술사로서 저는 철저하게 준비된 시간과 장소에서만 제 기량을 최대한 펼칩니다.
그리고 그게 제가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프로는 프로이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곳에서만 자신의 능력을 뽐낸다는 그의 말은 나에게 크게 와닿았다. 비록 나는 프로 마술사는 물론이고 '아마추어 마술사'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도 아까운, 그저 '마술을 하는 사람'정도에 그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관객에게 실망스러운 마술을 보여줘도 되는 면죄부는 아니다. 나 역시 나의 관객들에게 마술의 불가능함에서 오는 기적의 경험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나'가 아닌 '충분히 준비된 자리와 환경'에서 퍼포밍해야할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나는 여전히 언제 어디서나 보여주기 위한 마술들을 준비하고, 연습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목적은 남들에게 언제나 보여줄 나의 가벼운 장기자랑이 아니다. 나의 온전한 즐거움과 관객들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자리라면, 단호히 'No!' 라고 외치고 다음 기회를 말할 것이다. 그들이 기대한 나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여 관객들에게 더 큰 기적과 놀라움을 경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진짜 '마술'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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